학교를 무작정 재판하는 사람들을 재판한다
학교제도를 재판한다고?
교육은 낭만이 아니라 현실이다
생각보다 폭넓은 학교의 기능
학교 비판의 포인트
교사 입장에서 다른 선생님들 앞에서 교육에 대해 이런 저런 강의를 한다는 건 매우 부담이 크다. 교사들은 저마다 각기 다른 교육적 상황에 처해있고, 또 그 상황에서 나름의 방법과 노하우로 교육실천을 경험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의 실천과 경험이 어떤 참고가 될수는 있지만, 그것을 근거로 다른 교사들의 실천을 함부로 재단하고 따라오라고 할수는 없다.
그런데 겨울방학 들어 각 시도교육청, 특히 진보와 혁신을 자처하는 교육청에서 이루어지는 각종 연수에서는 교사들의 실천과 경험을 함부로 구시대의 유물로 재단하며, 각성을 요구하면서 꾸짖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오만한 발언을 하는 강사들이 애용하는 동영상(나는 강의에 유튜브 동영상 보여주는 일을 매우 게으른 행위로 본다) 중에 ‘100년된 학교제도를 재판합니다’라는 것이 있다. 어찌나 자주 틀어주는지 1급정교사 자격연수에 출석중인 어는 젊은 교사는 새해들어 벌써 이 동영상만 다섯번을 봤고, 심지어 꿈에까지 나오더라며 하소연을 했다.
미국의 어느 래퍼가 제작했다는 이 동영상의 개요는 이렇다. 먼저 어항속의 물고기를 보여준다. 그러면서 학교는 이 물고기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채 물고기를 억지로 나무에도 올라가게 하고 풀밭을 달리게도 했다며 비난한다. 물고기는 헤엄을 치고 싶지만, 학교는 물고기에게 나무에 올라갈것을 강요하고 결국 어떻게 해서든 나무에 올라가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래퍼는 교사들에게 반문한다. 물론 내용상으로는 학교에게 반문하는 것이다. 하지만 의인화된 학교는 결국 교사가 아니겠는가?. 실제로 이 반문을 듣고 당혹스러워 하는 주체들은 학교건물이 아니라 교사들로 표현된다.
“그래서 자랑스럽습니까?”
이 동영상이 비판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하다. 학교가 다양한 개성과 재능을 말살하고 표준화된 교육을 강요함으로써, 학생들을 개별적 특성을 상실한 표준인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어쩌면 모차르트나 아인슈타인이 될수 있었던 학생들을 근대 학교 체제는 모두 그저그런 회사원으로 바꿔버렸고, 심지어 그들에게 문제아의 딱지까지 붙였다는 것이다. 학교를 아이들을 갈아서 소시지로 만들어버리는 그라인더로 묘사하는 알란 파커 감독의 ‘핑크 플로이드의 벽(The Wall)’의 한 장면 역시 역시나 이어진다. 백년된 학교를 재판한다면서 인용하는 영상이 40년된 것이라. 그 낡은 학교체제가 참으로 지독하게도 안바뀌고 있다는 뜻일수도 있지만, 다른 하나는 학교를 비판하는 논리 자체도 이제는 너무 식상하고 낡은 것이 되어버렸다는 뜻일수도 있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돌아보고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과 잘 할수 있는 것을 알아내려면 익숙한 환경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환경 속에서 다른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집과 마을에서 경험하지 못했을 다양한 것들을 배우고 체험해 봐야 한다. 한 마디로 학교에 다녀야 한다.
교육은 낭만이 아니라 현실이다
핑크 플로이드의 ‘벽’은 계속 이어진다. 그 장면은 학생들이 교과서를 찢어 던지고, 교사를 쫓아내고, 학교에 불을 지르는 것으로 끝난다. 그럼 이제 여기서 상상실험을 해 보자. 교과서를 찢고 학교를 불지른 뒤 환성을 지르며 달려나간 아이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자신의 적성과 개성을 살려 학교에서 하지 못했던 가치있는 활동을 하면서 성장하고 있을까? 애석하게도 그러 아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대부분은 그냥 뛰어 놀것이며, 대중문화에 포획되어 버릴 것이며, 교사가 사라진 권력의 공백을 주먹이 센 아이들, 혹은 폭력배와 연결된 아이들이 차지하면서 정글의 법칙에 사로잡히고 말것이다. 암울하지만 이게 현실이다. 꿈과 끼를 가진 학생들은 아름답지만, 적어도 교육을 하겠다는 사람들은 꿈과 끼가 아니라 객관적인 현실과 경험적 증거를 따라야 한다. 실제로 수많은 연구결과들은 학생들이 결코 자기들이 하고싶은 것, 잘 할수 있는 것을 스스로 알아내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경우 어린시절의 환경, 부모 등 자주 만나는 어른들의 역할모델, 대중문화의 영향을 받는다.
아이들은 그저 신나게 뛰어 놀아야 한다라는 낭만적인 교육관을 피력하는 인사들도 있지만, 현실은 그것과 딴판인 것이다. 그런 말을 한 인사들 역시 자기 자녀가 신나게 뛰어노는 모습을 보면 흐뭇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사교육을 시키거나 특목고를 보내거나 조기유학을 보냈을수도 있다. 그 사람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게 인간의 숙명이다. 복잡한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역량과 지식은 신나게 뛰어놀면서 얻을 수 있는 것도, 하고 싶은 것, 즐거운 것 하면서 저절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생각보다 폭넓은 학교의 기능
학교는 생각보다 중요한 기능들을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많은 세월이 지나도 계속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제도를 개혁하거나 혁파하기 전에 먼저 그 제도가 만들어지고 유지되어 온 배경을 살펴보아야 한다. 분명히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정당하지 않을때 비로소 혁파의 칼날을 휘둘러야 한다. 그런데 학교는 인류의 생존과 발전에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하는 제도이며, 그 역할은 아직도 대단히 중요하다.
어항 동영상에서 래퍼는 학교더러 “물고기에게 나무에 올라가는 법을 가르친 것이 자랑스럽냐?”라고 따졌다. 하지만 학교에서 4반세기를 보낸 나는 그 질문이 전혀 반어적으로도 모욕적이거나 도발적으로도 들리지 않는다. 당연히 자랑스럽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학교가 인간의 위대한 발명품이라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물론 다람쥐가 지배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물고기에게 나무에 올라가는 법을 억지로 가르친 뒤, 나무에 올라가지 못했기 때문에 영원히 노예로 남으라고 가르친다면 이는 사악한 제도다. 아마도 이 점을 비판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살아가야 하는 환경이 물이 아니라 수풀로 바뀌었다면? 그렇다면 아무리 물고기라 할지라도 도리가 없다. 선택지는 둘 중 하나다. 죽던가 나무에 올라가던가. 그런데 나무에 올라가는 일은 물고기의 본성과 맞지 않다. 따라서 이는 외적 작용을 통해 익혀야 한다. 물론 물고기에게는 그 과정이 고통스러운 일이겠으나, 그래도 죽는 것보다는 났지 않은가? 그리고 그게 인간의 위대한 점이다. 인간은 ‘교육’을 제도화한 ‘학교’라는 기관을 발명해 냄으로써 자신의 본성과 어긋나거나 심지어 적대적인 환경변화에 대해서도 집단적으로 적응할수 있게 되었다. 더구나 개별 인간들의 개성의 편차는 생각보다 적어서 물고기와 다람지 만큼의 극단적인 차이는 나지 않는다. 그런 일은 X Men에서나 나오는 일이다. 심지어 X men 조차 인간과 차이보다는 공통점을 훨씬 더 많이 보유하고 있다.
따라서 학교는 물고기에게 나무에 올라가는 법을 가르치기 보다는 민물고기가 바닷물에서 생존할 수 있게 하는 정도의 차이를 가르치는 제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무리 개천에서 태어났더라도 용이 될 가능성이 있으니 용의 세계, 용으로서 살아가는 법도 가르치는 것이다. 이렇게 태어난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준비는 학교가 아니고서는 극소수의 아동 외에는 제공받을 수 없다.
실제로 근대학교제도는 수많은 아이들에게 가능성을 확장시켜준 진보적인 제도였다. 애덤 스미스는 노동자계급의 아이들이 아무런 기회도 없이 어릴때부터 공장과 광산에 드나들면서 노동자가 되어버리는 과정, 그리고 빈곤층의 아이들이 각종 범죄와 일탈에 노출되어버리는 과정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의무교육제도를 강하게 요구했다. “가난하게 태어났다고 꿈조차 가난할수는 없기” 때문이다. 학교는 노동계급과 빈곤층 자녀들이 태어나고 자란 환경에 고착되지 않고, 자신의 감추어진 재능과 적성을 발견하여 신분과 계층의 운명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 제도였다.
하지만 학교가 마냥 민중의 편만은 아니라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지배계급이 자기들의 세금을 걷어 학교를 운영할때는 분명히 자기들에게 어떤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이를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이 이른바 계급재생산론이다. 실제로 학교는 기존의 계급체제에 학생들이 순응하도록 하면서 동시에 대량으로 요구되는 양질의 노동력을 생산하는 공장의 기능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곤층 자녀들의 삶의 선택지는 학교가 없을때 보다는 학교가 있을때 조금이라도 더 확장된다. 민중들, 특히 빈곤한 민중들에게는 노동자로라도 재생산 되는 것이 아예 아무런 교육을 받지 않는 것 보다는 훨씬 삶의 질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개성을 말살하는 체제 재생산 도구로서 학교를 바라보는 관점은 너무나도 ‘중산층 중심적’ 관점이다. 그래서 주로 진보성향의 지식인들이 학교를 보수적인 지배체제의 일환으로 보고 맹공격했을때 신보수주의(신자유주의) 진영은 학교제도를 보수적으로 수호하려는 대신 대단히 쿨하게 “알았어. 너희들의 주장대로 학교를 축소시켜주마” 하면서 공교육을 축소하고 교육을 사사화(privatation)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일부 진보지식인들은 낡은 학교제도를 때려 부수는 일에 통쾌감을 느껴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에 동조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피해는 결국 민중들에게 돌아갔다.
물론 학교가 일부 특출한 재능을 말살하고 독특한 개성을 평준화하는 부작용이 있을수는 있다. 이는 학교가 보통교육기관이기 떄문이다. 하지만 이는 그런 특별한 소수를 위한 특별한 교육기관이나 프로그램으로 보충할 일이지, 그 소수의 고통과 불행을 근거로 들어 학교 자체를 재단할 일은 아니다. ‘꿈과 끼’는 아름다운 말이다. 앨빈 토플러부터 시작해서 이런 저런 이른바 멘토들은 걸핏하면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꿈과 끼를 말살하는 학교를 비판하면서, 학생들은 공부가 아니라 ‘자기가 하고싶은 것’과 ‘잘 할수 있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이게 말 처럼 쉬운게 아니다. 가령 자신이 하고싶은 것, 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어느정도 알아채는 나이는 빨라야 중학교 이후의 일이다. 물론 그 중에는 아주 특출난 재능이 있어서 어린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내는 학생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학생을 바보로 만드는 학교라는 비판은 항상 그런 특출난 학생을 예로 든다. 95%의 학생들은 완전히 소외되어 버린다. 흔히 우리는 입시교육을 5%를 위해 95%를 포기한다며 비판한다. 하지만 특출난 개성과 재능을 위해 공교육을 뒤흔드는 행위야 말로 5%를 위해 95%를 무지와 편견의 바다에 방치하자는 주장이 아닐까?
학교 비판의 포인트
학교가 영원히 지속되어야 하는 불변의 제도는 아닐 것이다. 학교는 끊임없이 바뀌어야 하며, 필요하다면 완전히 뒤집히기도 해야 한다. 하지만 그 과정은 신중하고 면밀하고 과학적이라야 한다. 교육은 절대 낭만주의가 아니라 사실주의, 아니 자연주의가 지배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특히 학교를 비판하면서 “하고 싶은 일”을 용감히 하라고 충고하는 멘토들의 발언을 검토할때는, 그 멘토들 역시 그런 특출난 학생 중 하나였으며, 그 자신의 존재적 기반에서 발언하고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나는 물고기에게 나무에 올라가는 법을 가르친 것이 자랑스럽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이 살아가야 할 환경이 요구한다면 물고기를 어떻게 해서든 하늘을 나는 법, 땅을 파는 법까지 가르쳐 보려 노력할 것이다. 오히려 이런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을때, 학교는 냉정한 비판대위에 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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